Aug 07

일전에도 밝혔듯이 나는 호러물, 미스터리물, 괴기물 이런 장르에 환장하는 사람이다.

그 묘한 취향 탓에 좀비(zombie)가 소재인 영화들은 닥치는대로 보곤 했는데,

특히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들은 신작이 나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봐야 직성이 풀린다.

살아있는 시체, 신체 접촉 또는 공기 중 감염을 통해 끊임없이 세력을 넓혀가는 바이러스같은 존재, 좀비.

출연 작품이 많은 좀비다 보니, 영화마다 모습도 하는 행동도 천차만별이고 어떤 게 진짜 원래의 좀비다운(?) 좀비인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지만,

다행히도 그런 좀비들의 선조들 이야기가 있었으니 리처드 매드슨의 1954년 작품,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가 되겠다.

유명한 작가 스티븐 킹은 이 작품을 읽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남겼다 하니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미국 문학 내 입지와 유명세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원래 유명하고 또 대단한 작품이다 보니 지금까지 많이 영화화 되었는데,

1964년 지상 최후의 남자 (The Last Man On Earth)

1971년 오메가 맨 (The Omega Man)

2007년 나는 오메가 맨 (I Am Omega)

2007년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

등이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2007년 제작된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일 것이다.

2007년 개봉할 당시에도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작품이건만, 당시에 나는 막 사회에 발을 내딛은 사회초년생 입장이라 정신도 없었고,

한편으로는 좀비 마니아로써 반드시 원작을 읽고 영화를 보겠다는 생각에 영화보기를 미뤄두었었다.

그러다 이번에 원작소설을 구해 읽게 되면서 바로 이어서 영화를 보았는데..
(요즘 지상파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도 “나는 전설이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던데, 이것 때문에 갑자기 챙겨본 것은 물론 아니다)

맙소사.. 이 정도면 원작을 살리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창작물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많은 자본을 쏟아부은 헐리웃 영화답게 볼만한 영화이긴 한데, 이 작품의 타이틀이 왜 “나는 전설이다”인지,

왜 주인공 로버트 네빌이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아래부터는 원작소설이나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소포일러성 글이 될 수 있다]

2차 대전 종전 후, 전쟁과 죽음의 장막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에 집필한 작품이라 그런지, 이 작품의 배경은 무엇인가가 전세계를 휩쓸고 지나가(그것이 세계전쟁이든, 핵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재앙이든) 인류가 모두 죽거나 흡혈귀가 되어버린 절망적인 세상이다.

면역력을 갖춘, 유일한 생존자 로버트 네빌은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극도의 외로움에 절망하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영화에서는 “샘”이라는 이름의 충직한 개가 늘 함께 해주지만 원작에서 그는 혼잣말하는 것에도 점점 지쳐갈 정도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살아간다.

그 고독을 떨쳐내기 위해 인류릐 재앙을 몰고 온 바이러스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 수많은 실험으로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 네빌.

영화에서 그는 뛰어난 생물학 전문가로, 지하에 그럴 듯한 실험실까지 갖추고 있고 결국 인류를 구해내는 영웅이 되지만

원작에서 그는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구해다 읽으며 마늘, 햇빛, 십자가 등 흡혈귀에 대한 전통적인 미신들을 깨뜨리며 진실에 접근해가는 초보적인 과학자일 뿐이다.

즉, 영화와는 달리 소설 속의 네빌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생존자에 그칠 뿐, 인류의 미래를 짊어진 채 비장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인류를 구해내는 구국의 영웅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소시민, 어쩌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뿐인 우리네 평범한 시민의 모습인 것이다.

내가 영화에 실망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점이었다.

나는 헐리웃 영화의 영웅신화에 이미 질린 상태이고, 굳이 원작을 훼손하면서까지 영웅 만들기에 열 올리는 미국 아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또, 매일 매일을 고독과 싸우다 지쳐 술의 힘을 빌리고, 난폭한 행동으로 고독을 잊으려 애쓰는 네빌의 고뇌를 영화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영화 종반에 샘이 죽게되어 자살을 시도할 때 얼핏 전해지기는 하지만,

한적한 도로를 차로 질주하기도 하고, 멈춰버린 모함 위에서 빌딩을 향해 티샷을 날리기도 하며, 그러다가 사슴을 발견하고는 사냥에 나서기도 한다.

뭐랄까, 내게는 그저 그 상황에 만족하고(물론 체념이겠지만) 어찌보면 즐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면 미안하다,

나는 수준 떨어지는 관객일 뿐이니까.

어쨌든 네빌의 고뇌가 영화의 중심이 되지 못한 부분은 아주 안타까웠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정말 실망한 부분이라면 사실은 결말 부분이다.

원작소설에서 네빌은 어느 날 들판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 이외에 또 다른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감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그의 예상대로 감염된 상태로 밝혀지고, 네빌은 그녀가 자신이 알던 흡혈귀들과는 달리 진화된 형태의 또 다른 인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인류의 의해 전 세대의 유일한 생존자 네빌은 죽음을 맞게 되고, 정상이란 다수를 위한 개념이므로 홀로 남은 자신은 이미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게 그는 전설이 되어 죽는다.

왜 이 작품의 제목이 “나는 전설이다”인지, 왜 이 작품이 그토록 많은 호평을 받으며 미국 문학계의 전설로 자리했는지 알게 해주는 멋진 결말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어떤가.

샘의 죽음으로 삶을 포기하려던 그를 마지막 순간에 구해주는 손길, 그것은 또 다른 생존자였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좀비들의 습격을 받게 되어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그들은 생과 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밝혀지는 바이러스 치료법의 발견!!

네빌은 자신을 희생시키며 그 치료법을 생존자들의 마을에 전달하게 하고, 이로써 인류의 영웅 네빌은 전설이 된다는 결말.

뭔가 석연치가 않다.

이런 의미의 전설은 아니잖은가..

사실 이 영화에는 또 다른 엔딩이 존재한다.

생체실험을 위해 잡혀있던 좀비는 사실 그들 집단 우두머리의 애인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구출을 위해 습격을 하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깨닫고 순순히 그 여자좀비를 풀어주는 네빌에게, 좀비들(어느 새 사회적인 조직 형태와 지능을 갖추기 시작한)은 인간과의 공존이라는 카드를 슬며시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역시 어딘가에 있다는 생존자 마을을 향해 떠나는 네빌과 생존자들..

이 엔딩 역시 막장이다=_=)

기존에 영화화된 작품들을 보며, 불만족을 표했다는 리처드 매드슨은 아마 이 영화를 보고도 한숨을 쉬었을 것 같다.

영화가 원작을 너무 충실히 따르는 것도 안될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놓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아니던가.

수년 후, 또 다른 영화화가 시도된다면, 부디 “원작보다 나은 영화!”라는 감탄이 내 입에서 나올만한 작품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ex libris >>

어떻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와 싸울 수 있단 말인가?

- p.30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 p.221

 

이제 나는 전설이야.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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