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공지영.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작가이긴 하지만, 그가 90년대부터 한국 문학계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특히 대중적인 사랑을 많이 받았던 “봉순이 언니”, 영화화되었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최근작 중 하나인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등을 통해 그는 널리 알려진 작가다.
하지만 내가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기에는 대중적인 인지도와 문학적인 완성도가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초창기 단편집을 통해서.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건, 제목 “인간에 대한 예의”가 주는 강한 끌림 때문이었다.
살아가면서 나는 점점.. 무엇인가를 향한 “예의”라는 것이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절차나 방식을 의미하기 보다는 그 내면에 자리한 태도나 의도에 중심을 맞추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와 함께, 예의를 갖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타인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예의를 지킨다는 것.
철이 들고,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한창 더 배워야 하고 성장해야 할 나에게 있어 그것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
일전에 김형태님의 “너, 외롭구나”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의 알리바이에 대한 글을 옮겨담았던 적이 있다.
그 이후, 내 머릿속에 자리한 “알리바이”라는 단어는 “현장 부재 증명”이라는 범죄학적 의미에 더해, “시대와 역사, 그리고 현재의 자신에 대한 양심”이라는 의미를 새로 부여받게 되었고
나는 내 알리바이에 충실하기 위해 종종 내 자신을 뒤돌아 보곤 했다. (물론 아직은 부끄러운 시선을 거둘 수 없는 그런 삶이긴 하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작품은 그 “알리바이”를 다룬 작품이다.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어느 장기수, 그리고 그를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투쟁을 통해 세상의 변혁을 꿈꿨던 과거의 자신과 안락한 삶의 댓가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살아가는 현재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자의 이야기다.
짧은 내용이지만, 많은 상념에 젖어들게 만들었던 소설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 외에도 총 9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데, 많은 작품들이 “인간에 대한 에의”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의 소설들이 “운동권 경력을 활자에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배면에 깔려 있다는 의혹을 떨치기 힘들다”는 평론가 정문순의 비판처럼 이 단편집이 운동권의 경험을 다루는 “후일담문학”의 짙은 냄새가 배어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게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닐 뿐더러, 소설들이 씌여진 시기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라는 점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 libris >>
임마, 너 시궁창에 빠져본 일 있냐? 난 있다. ……물이 생각보다 뜨뜻하데. ……그 기분 너는 모를거다. ……더는 더러워질 수 없는 느낌, 더는 모욕당할 수 없는 평화…… 그건 좋은 거야. 그리고 거기서부터 정말 우리는 시작하는 거야.
- p.31, 꿈
여기,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 p.96, 인간에 대한 예의
목숨을 걸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난 정말 그럴 수도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일상을 걸 수는 없었어. 자잘한 나날들을 건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보다 더 힘들었어. 나의 미래…… 나의 젊은날…… 젊음을 건다는 건 미래를 거는 일이고 일상을 건다는 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삶을 거는 거잖아…… 목숨을 거는 일이 차라리 쉬웠을 거야…… 하지만 나는 정말 목숨이라도 걸고 싶었었나?
- p.113,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