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기에는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을 한다.
늘 “나”를 중심으로 주변 세계를 재구성하고, 거기에 맞춰 사물과 사람과 사건을 인식한다.
그러다, 좀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되면서부터, “내”가 아닌 “내 주변”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성장해가고, 어른이 되어 간다.
어른과 아이를 구분짓는 가늠자는 타자에 대한 인식에 있다.
내가 성장하기 시작한 계기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즈음의 일이었다.
윤리 교과서에 나왔던 문장,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의 정의는 저쪽에서는 정의가 아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문장이다.
아주 간결하지만, 그래서 더욱 극명한 공리로 내게 각인된, 저 한 줄의 문장은
그때까지 내가 정의의 사자라도 되는 양, 나는 항상 정의롭고 절대선을 추구한다고 믿어왔던 나의 맹신을 무너뜨렸고,
세상에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정의, 절대적인 믿음은 없다는 이치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껍질을 깨고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새처럼, 나의 좁은 세계를 파괴할 수 있었고, 비로소 어른이 될 자격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격”을 얻게 되었을 뿐.
물론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어른되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기는 하다.
…
지난 주말, 아는 사람을 만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전날 늦은 밤에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
물기어린 목소리로 내일 만나자는 말에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뭔가 내게 할 얘기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못생긴 얼굴이지만, 다행히도 남에게 해코지할 만한 얼굴이 아니어서인지 내 주변 사람들은 내게 종종 자신의 비밀스러운 얘기를 털어놓곤 하는데,
그 날도 다른 사람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아주 개인적인 사건을 내게 이야기 해 주었다.
사실 그 사건의 당사자 모두와 친분이 있었던 나로서는, 한쪽 일방이 완전한 가해자가 되었던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부끄럽게도 나는,
그 지인에게 그냥 침묵하는게 좋을 것 같다는 비겁한 조언을 해주고 말았다.
좀 더 분노했으면 좋았으련만.
좀 더 다독여줄 수 있는 얘기를 해줬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에게 어떤 상처든 낫기 마련이라고, 단지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에 따라 아무는 데에 시간이 더 걸릴 뿐이라고,
그리고 절대로 혼자 있지 말라고, 스스로 상처주며 자신을 망가뜨리지 말라고,
그보다 더 어린 주제에, 세상을 덜 살아본 주제에 어른인 척, 세상의 풍파에 더 많은 상처를 입어본 척 했을 뿐이었다.
좀 더 내 감정에 솔직하고, 내 자신의 정의에 합치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어른이 되어가는 댓가로 나는 점점 비겁해지고 있는 것일까?
내 주변 사람들의 얘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여유의 댓가로 내가 믿는 바를 좀 더 완고하게 지켜나갈 용기를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지인과 헤어질 때,
오늘 갑작스런 얘기를 꺼내 분위기를 울적하게 만들었다며 그는 내게 미안해했고,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넌 고민 없지?” 라고..
그 말이 내게는, 그런 상황에서조차 짐짓 어른인척 가식을 떨었던 내게 던지는 비난처럼 들려서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뿐, 나는 여전히 침묵했다.
용기는 두려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용기란 두려워도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며 행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나는 비겁하다.
내가 가진 믿음은 쉬이 흔들리고, 내 용기는 쉽사리 힘을 잃는다.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따름이었다.
요즘처럼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없었다.
침묵을 강요하고, 나 역시 입을 굳게 다문 채, 나는 오늘도 비겁해진다.
결국 세월이 약이라는 상투적인 말로 내 비겁함을 자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