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뚜꺼운 책 3권, “모방범”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솔직히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나는 소설이 끝에 다다르고 있음을 아쉬워하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일본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미야베 미유키”의 장편소설 “모방범”은 트릭과 반전으로 포장된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다.
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을 다 궤뚫고서 일련의 연쇄살인과 그 사건 이후의 범인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눈으로 좇아가기만 할 뿐이다.
의외의 전개도 없고, 사건을 풀어나가는 매력적인 캐릭터도 나오지 않는다.
다 읽고난 지금에는 오히려 “쓰카다 신이치”라는 소년의 성장소설이라고까지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재미있다.
범인과 형사, 피해자 유족과 그 주변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유족)에게 소설의 중심을 맞추고 있어 다소 신선한 느낌마저 안겨준다.
…
잔혹한 범죄 사건들이 종종 언론에서 회자되고, 우리는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범죄자들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곤 한다.
하지만, 그 범죄의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따뜻한 관심을 가져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그들은 대중들에게 피해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해야 하는 모순된 입장에 처해있기는 하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피해자들이 어느 정도 사건의 빌미를 제공했으리라는 편견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포털 뉴스의 댓글 중에서 그런 삐딱한 시선의 편린을 발견할 때면,
나도 ‘글쓴 놈이 그런 일을 당해봐야 정신차리지’ 하고, 저주의 마음을 품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인간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비단 범죄자들만은 아닌 것 같아 씁쓸함을 느낀다.
ex libris >>오해를 각오하고 말하자면, 범죄란 ‘사회가 갈구하는’ 형태로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 1권, p.111
피해자가 그런 유해로 돌아온다는 것은 수사본부로서는 견디기 힘든 굴욕이며, 피해자 유족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창상이 아닌 열상이다. 아문 후에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이 남는다.
- 1권, pp.328~329
사람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선전이야말로 선악을 결정하고, 옳고 그름을 결정하고, 신과 악마를 나누는 것임을. 법이나 도덕규범은 그 바깥에서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 1권, p.343
만일 이 세상에 거울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점검해주고 자신이 자신을 관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철저하게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이고,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 2권, p.99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내가 곁에 있으니 괜찮다고 말을 거는 순간에, 그는 다른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처음부터 듬직한 인간은 없다. 처음부터 힘있는 인간은 없다. 누구든 상대를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순간에 그런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2권, p.365
“잘 들어. 인간이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야. 절대로 그러지 못해. 물론 사실은 하나뿐이야. 그러나 사실에 대한 해석은 관련된 사람의 수만큼 존재해. 사실에는 정면도 없고 뒷면도 없어. 모두 자신이 보는 쪽이 정면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어차피 인간은 보고 싶은 것밖에 보지 않고, 믿고 싶은 것밖에 믿지 않아.”
- 2권, p.493
“살인이 잔혹한 것은, 살인이 피해자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의 생활과 마음까지 서서히 죽여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자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자신의 마음이야. (후략)”
- 3권, p.280
진실이 자신에게 직접 닥쳐와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인간은 그것과 직면할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안락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닌 해석을 ‘진실’로 채택하는 것뿐이다.
- 3권, p.377
“(전략) 넌 많은 사람들을 속였지만 결국 그 거짓말은 들통이 나고 말았지. 거짓말은 반드시 들통이 나. 진실이란 건 말이지, 네놈이 아무리 멀리까지 가서 버리고 오더라도 반드시 너한테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
- 3권, p.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