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05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천명관의 “고래”는 한 마디로 재미있는 소설이다.

다음에 등장할 인물을 궁금해하며, 다음 장에 전개될 이야기를 상상하며, 정말 오랜만에 책장 넘기기의 즐거움을 느껴본 것 같다.

국밥집 노파 – 금복 – 춘희로 이어지는 하나의 서사가 이야기의 큰 축을 이루고 있지만,

그 속에는 개성 넘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엮어내는 크고 작은 이야깃거리들이 무수히 자리하고 있다.

전통소설을 읽는 듯 하다가도 갑자기 판타지 소설같은 황당함에 놀라게 하는,

“고래”의 낯설지만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전통적인 소설 형식의 파괴도 신선하게 다가왔고,

중간 중간 끼어드는 변사의 “구라” 섞인 거침없는 입담 또한 나를 피식거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천명관이라는 작가가, 문학적으로 어떤 파장을 몰고 온 작가인지, 그의 문학사적 위치가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소설을 통해 그가 이야기꾼으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점은 명확히 알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참 재미있지만, 결코 영화화 되거나 드라마화 되지는 못할 것 같다고.

상업적인 영상의 틀만으로 담아내기에는 “고래”는 너무 큰 상상력이 필요한 작품이라고.

 


ex libris >>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그것은 춘희와 같은 감방 안에 있던 한 여죄수의 말이었다. (중략) 덧붙여, ‘죽음이란 건 별게 아니라 그저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은 일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pp.10~11

 

올 것은 결국 오고야 만다. 아무런 전조가 없어도. 그것은 운명의 법칙이었다.

- p.113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간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 p.188

 

새벽마다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사람들은 투덜대면서도 달콤한 이불 속에서 기어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장군은 사람들의 잠을 빼앗아갔고 세상은 더욱 피곤해졌다.
(중략) 사람들은 하는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바빠 허둥거렸고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이유 없이 속이 헛헛해 다방을 찾아가 독한 커피라도 한 잔 들이부어야 겨우 속이 차는 듯싶었다. 또한 다방에 앉아 하릴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다보니 사람들간의 관계는 더욱 번잡스러워졌고 시비는 늘어났으며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느라 술값이, 혹은 커피 값이 더 많이 들어가 소비가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마음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 p.220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 p.271

 

재판정은 그저 피고의 운을 시험하는 무대였을 뿐 정의와는 애초에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장군의 시대는 대게 그런 식이었다.

- p.311

 

지식인이란 부류는 대개 음험한 속셈을 감추고 있어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아무하고도 짝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p.343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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