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에, 누군가가 내게 “기자들”이라는 책을 추천해줬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책은 이미 절판되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이었고, 단지 저자 “고종석”이라는 이름만이 내게 기억될 뿐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읽어두어야지 하고, 내 머릿속의 책장 한 켠에 고이 간직해두고 몇해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전, 제목에 쉽게 낚이곤 하는 나는,
인터넷 서점의 광고성 메일에서 “경계긋기의 어려움”이라는 책 제목에 나도 모르게 이끌리게 되어 새 창을 띄웠고
곧 그 책의 저자가 바로 “고종석”이라는 낯익은 이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출판사도 친근함이 느껴지는 “개마고원”이다!)
경계긋기의 어려움.
작가가 사용한 의미와는 차이가 있지만, 나 역시 요즘 여러가지의 모호한 경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차원의, 그러나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동시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작가는 고민한다.
삼성 제품을 쓰면서, 조선일보에 글싣는 일은 거부하는 자신의 태도가 과연 자신이 만든 경계에 견줘 일관된 행동인지,
삼성의 윤리와 조선일보의 윤리에 우열이 있는 것인지,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해 고민한다.
경계긋기의 어려움.
/사족의 글/
평소 우리말에 관심 많은, 기자 출신의 작가이기 때문인지 일상에서 자주 쓰지 않는 우리말 표현이 자주 눈에 띄었다.
개중에는 생소한 단어들도 있었고, 눈에는 익지만 입에는 익지 않은 표현도 있었다.
느껍다, 무람없다, 어기차다, 벼리다, 허릅숭이, 깜냥, 너울 등등..
출처도 모르는 단어와 표현들이 난무하는 웹세상의 글들을 자주 접하는 요즘이라 그런지 더 반가운 읽기가 되었던 것 같다.
ex libris >>이 정권은 분명히 5공 정권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정권은 노태우 정권까지 포함한 6공의 다섯 정권 가운데 가장 무엄하고 미련한 정권이다. 걱정이다.
- p.44, 「허물어지는 ‘영광의 20년’」
대한민국은 우파만의 나라도 아니고 좌파만의 나라도 아니다. 우파와 자파가, 그 사이와 그 너머의 온갖 파가 다 대한민국이다.
- p.74, 「잠들지 않는 남도」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른들보다 더 선해 보이지는 않는다.
- p.121, 「끔찍한 동심」
민주주의가 좋은 체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덜 나쁜 체제라는 말이 뜻하는 것 하나가 바로 이 언저리에 있다. 한 사회가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한 이상, 공적(公的) 옳음의 근거를 여론이나 민의 바깥에서 찾기는 어렵다.
- p.142, 「브레히트에 기대어」
전쟁의 가장 큰 불공평함은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과 그것의 가장 큰 피해자가 분리된다는 점이다.
- p.184, 「’원산 상륙’이라는 망상」
토론자들도 지적했듯, <100분 토론>의 주제 가운데 정치 분야가 압도적으로 많게 된 것은 정치가 한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어떤 쟁점이 겉보기에 경제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그것은 근본적으로 정치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무릇 갈등은 권력이나 사랑까지를 포함한 유·무형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놓고 생겨나게 마련이고, 그 분배의 기술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 p.194, 「30000분 토론을 축하하며」
물론 알멩이 없는 구호에서 정 의장에게 결코 지지 않을 사람들이 한나라당에는 수두룩하다. 제게 정치적으로 불리하다 싶은 일만 생기면 난데없이 ‘국가정체성’을 되뇌는 이들을 보면, 내 어린 시절의 고장난 라디오가 떠오른다. 전류는 흐르는데 주파수 동조가 잘 안돼 지지거리기만 하는 고물 라디오 말이다. 이들은 ‘국가정체성 수호’를 외칠 뿐 그 국가정체성의 실속이 무엇인지는 살갑게 알려주지 않는다. 입만 열면 ‘민생’을 외치면서도,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는 데는 결사반대다.
- p.203, 「정치는 수사라지만」
어떤 공인된 전문가도, 어떤 공인된 대가(大家)도 틀릴 수 있다. 술에 취해 한 말이라 그럴 수도 있고, 격정이나 편견이나 이해관계에 휘둘려 쓴 글이라 그럴 수도 있고, 그가 본디부터 이름에 미치지 못하는 헐렁이여서 그럴 수도 있다.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지적 독립의 첫걸음이다.
- p.239, 「말의 힘」
문학사가 특권적 자리를 부여한 운문 작품이든 노래방에서 소비되는 유행가든, 사랑의 언어는 대체로 실연의 언어고 이별의 언어다. 사랑은 결핍 상태에서 가장 치열하기 때문이다.
- p.277,「슬픈 사랑노래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