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18

옛날에 서당선생이 삼형제를 가르쳤겠다. 어느 날 서당선생은 삼형제에게 차례대로 장래 희망을 말해보라고 했겠다. 맏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정승이 되고 싶다고 하니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칭찬했겠다. 둘째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겠다. 이 말에 서당선생은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그럼 그렇지 사내 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 했겠다. 막내에게 물으니 잠깐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했겠다. 표정이 언짢아진 서당선생이 그건 왜? 하고 당연히 물을 수밖에. 막내 말하기를, 나보다 글 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또 나보다도 겁쟁이인 둘째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하니 서당선생이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겠다. 그럼 마지막 한 개는? 하고.

여기까지 말씀하신 할아버님께선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세화야, 막내가 뭐라고 말했겠니?” 하고.
나는 어린 나이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선생 먹으라고 했겠지요, 뭐.”
“왜 그러냐?”
“그거야 맏형과 둘째형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 그렇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그런데 만약 네가 그 막내였다면 그 말을 서당선생에게 할 수 있었겠냐?”
어렸던 나는 그때 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할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화야,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하게 되면 세 개째의 개똥은 네 차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는 커가면서 세 개째의 개똥을 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인정해야 했다. 내가 실존의 의미를, 그리고 리스먼의 자기지향을 생각할 때도 이 할아버님의 말씀이 항상 함께 있었다.

- pp.237~238, 「개똥 세 개」중에서

요즘 나는 매일 세 개째의 개똥을 먹는다.

나는 어느 틈엔가 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집과 회사만을 말없이 왕복하는 소시민이 되었고,

수 년 전이라면 내 분노를 끓게 만들었을 법한 사건들을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하며 못 본 체 좌시하며 생활의 노예로 살아가는 삶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많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더 이상 세 개 째의 개똥을 내 몫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할 텐데..

나의 아이들에게 “개똥 세 개” 이야기를 해주며 떳떳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ex libris >>

그러나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은 그 만남으로 또는 눈물로 그쳐선 안될 일이었다. 만남도 눈물도 사랑에서 오고 또 사랑을 요구한다. 또한 그 사랑은 사회 안에서 반드시 앙가주망(참여)를 요구한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다만 ‘나 자신과 끝없는 싸움’으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알기 전에 증오부터 배웠다.

- p.54

 

나의 처지는 나의 의식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다른 사람의 의식도 규정하였다.

- p.62

 

한가지 아주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 그것은 베르뜨랑은 그의 권리를 주장한 데 반해 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그를 미워한 점이다. 그의 주장이 틀렸으면 그 주장을 반박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미워했다. 그는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단지 그와 나의 생각이 서로 달랐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싸운 이튿날 그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대했고 나는 계속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 차이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에선 이 주장과 저 주장이 싸우고 이 사상과 저 사상이 논쟁하는 데 비하여 한국에선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또 서로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인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 주의 주장 또는 사상을 일단 그의 것으로 존중하여 받아들인 다음, 논쟁을 통하여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데 비하여 우리는 나의 잣대로 상대를 보고 그 잣대에 어긋나면 바로 미워하고 증오한다.

- pp.111~112

 

갈 수 있는 나라: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 p.153

 

사람이 미래를 모르고 불안하긴 하나 위험하지는 않단다. 아니, 미래를 모르고 사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단다. 그러나 과거를 모르고 사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란다. 그것이 개인의 과거이든 민족의 과거이든……

- p.226

 

똘레랑스란 첫째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합니다. 이 뜻은 내가 임의로 규정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말 사전이 밝힌 똘레랑스의 첫번째 뜻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respectez, et faites respecter).”

(중략)

똘레랑스의 요구는 정치적 성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똑같이 적용됩니다.
똘레랑스는 당신에게 당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이웃을 인정하고, 외국인을 인정하고 또한 당신과 다른 생활방식, 다른 문화를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중략)

똘레랑스의 두번째 말뜻으로 프랑스말 사전은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똘레랑스는 원래 ‘허용 오차’를 뜻하는 공학 용어인데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어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라는 뜻이 된 것입니다.
똘레랑스의 첫번째 말뜻이 ‘나와 남 사이의 관계’ 또는 ‘다수와 소수 사이의 관계’에서 나와 남을 동시에 존중하고 다수가 소수를 포용하기 위한 내용을 품고 있다면,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라는 똘레랑스의 두번째 말뜻은 권력에 대하여 개인이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려는 의즈를 품고 있습니다.

(중략)

즉, 프랑스의 개인은 권력에 대하여 똘레랑스를 갖고 있음에 반하여 한국의 개인은 똘레랑스는 없이 다만 권력에 의해 강제되고 희생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권력은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에 반하여 한국의 권력은 그 현대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역사에 대해서나 사회에 대해서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 pp.289~302, 「보론 –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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