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21

태백산맥아리랑에 이어 드디어 조정래의 세번째 대하소설 한강을 읽었다.

시대배경은 아리랑태백산맥의 시대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치는 동안의 한반도의 현대사를 담았다.

해방 이후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권력 독점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던 소설이었고,

실제로 주인공 형제(대하소설에 특별한 주인공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중심이 되는 인물들)인 유일민-유일표 형제들에 대한 애정도 이전 소설들에 비해 남달랐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인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다뤄져서 더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어쨌든 사회의 약자들이 치열하게 살아가고, 그 속에서 역사라는 거시적인 움직임을 미시적인 요소들로 구성하는 재주만큼은 조정래라는 작가의 특별한 장기인 것 같다.

유일민-유일표 형제가 살아가는 모습에 연좌제로 희생당한 이들의 삶이 녹아있고, 신문기자 이상재와 원병균의 투쟁 속에 시대와 타협을 거부했던 언론인들의 정신이 베어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늘 제자리에서 맴돌뿐인 천두만의 일상에 국가와 기업이 모든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던 시대상이 비춰지고, 돈을 벌기 위해 월남과 중동으로 길을 떠나는 문태복의 뒷모습에 ‘한강의 기적’이 기적이 아니었음을 자각케하는 상황들이 놓여있다.

불과 20~30년 전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지금 세대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모습으로 조금씩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무지함을 새삼 깨달으며, 좀 더 분명하고 확고한 역사 인식을 위해 이런 나의 무지와 싸워 이기자는 각오를 하며, 한강의 마지막 책장을 무겁게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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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말투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라는 눈치를 챈 유일표는 그냥 광주가 아니라 ‘전라도 광주’라고 대답했다.
“어머, 학생이 하와이야?”
여자는 콩나물을 팔기 싫다는 듯 콩나물 담던 손을 멈추고 유일표를 뻔히 쳐다보았다.

“있지. 우리의 위대하신 국부 이승만 대통령 각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아주 멋들어진 플랜을 짰지.”
강숙자가 과장된 몸짓을 지었다.
“흥, 대통령 생일이라고 공휴일로 쉬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이 나라뿐일 거야. 우습지도 않아.”

혁명이란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응결된 분노와 증오의 집단적 폭발이었다.

“그런데, 아랫것들이 속이고 잘못해서 그렇지 이승만이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 딱해 하는 사람들도 많던데요?”
“뭐야? 어떤 놈들이 그따위 소릴 해. 그런 놈들은 다 이승만 밑에서 단물 빨며 나라 망친 놈들이고, 대가리에 똥밖에 든 게 없는 팔푼이들이 지껄이는 소리야. 자네 똑똑히 들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철저하게 옹호한 것, 헌법 고쳐 독재해서 나라 망친 것, 이번에 학생들 무더기로 죽인 것, 이보다 큰 죄가 어디 또 있나. 그리고 엊그제 일본 < 요미우리신문>에 났던 기사 봤지? 일본 은행에 빼돌린 돈이 500만 달러야. 우리나라 돈으로 45억 환인데, 그 돈이면 쌀이 몇 가마닌 줄 알아? 원조받아 전쟁으로 엉망진창이 된 나라를 재건해야 되는데 그 돈을 빼돌렸으니 그게 강도지 대통령이야? 이래도 죄가 없어!”

- 1권

 

모든 자유는 언제나 구속 속에서 존재하는 거야.

- 2권

 

승자의 웃음은 누구나 부러워하지만 패자의 눈물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 3권

 

“꿈은 클수록 좋고, 욕망은 치열할수록 좋다.”

“정의와 진실은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한다. 다만 긴 역사 속에서 승리할 뿐이다.”

- 4권

 

끝으로 말하자면 말야, 자기네 일을 자기들 스스로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너희들 똑똑히 기억해. 너희들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야. 사람은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어.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어. (중략) 절대로 잊지 말어.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야!”

하여튼 정치가들이란 염치없이 뻔뻔스럽고, 양심 없이 거짓말해 대는 못된 인간들의 표본이야. 어쨌든 정치란 아더메치야.”
‘아더메치’란 귀를 덮는 장발과 함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말로,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는 줄임말이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3선개헌 명분에는 경제발전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북의 줄기찬 도발에 맞서 안보를 튼튼히 하면서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영도자, 그가 바로 박정희라고 내세우고 있었다. 독재의 명분을 북쪽에서 제공해 주고 있는 형국이니 이 또한 괴이쩍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분,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바보입니다. 첫째 우리는 근로기준법에 의해서 당당하게 인간으로 대접받으며 일할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껐 기계 취급을 당해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모임은 바보들의 모임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철저하게 깨달아야만 언젠가는 바보 신세를 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저는 이 모임을 준비하면서 나이 든 선배 재단사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건 가당찮은 일이다. 노동운동 한다고 설치고 나서는 놈은 바보’라고 했습니다. 예, 좋습니다. 우리가 다 흩어져 있을 때는 아무 힘도 없는 바보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열이 뭉치면 열 개의 힘이 되고, 백이 뭉치면 백 개의 힘이 됩니다. 그 힘으로 밀고 나가면 안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바보들이 철통같이 뭉칩시다. 그래서 바보들의 힘이 얼마나 큰지 이 세상에 당당하게 보여줍시다.”

이루어진 것 없이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전태일은 한 해가 스러져가는 마지막 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일기를 적었다.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나는 결단코 투쟁하련다. 역사는 증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전신이 떨리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히며 절실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게 하여주십시오. 약한 저를 도우소서.

- 5권

 

순식간에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전태일은 큰길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불길 속에서 전태일이 외쳐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향해 뛰는 불길이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아!”
더 거세게 휘돌고 너울거리는 불길 속에서 울부짖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전태일은 불길과 싸우며 무슨 구호를 또 외쳤다. 그러나 입에서는 말 대신 허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또 외쳤다. 역시 허연 연기만 한 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불길과 함께 쓰러졌다.

문제는 잘못된 ‘공업입국’의 경제정책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국제 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계속 신장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저임금 정책을 확정했고, 저임금을 유지시키려면 물가를 안정시켜야 하고, 물가가 안정되려면 노동자들의 주식인 곡물가격을 통제해야 하고, 곡물가격이 억제되면 농민들이 몰락해 이농을 하게 되고, 이농한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도시로몰려들고, 그러면 도시 노동력은 과잉이 되어 임금이 싸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이중효과를 나타냈다. 그런 이농현상으로 해마다 50만 명 이상이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도시빈민 문제를 야기시켰다.

- 6권

 

김기돈은 건너편 사원으로 달려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무작정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김기돈은 책에서 읽은 코란의 한 구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당한 가르침이고, 지고한 일깨움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면서 자기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일은 없다고 했다. 20여 분 동안 알라신께 죄짓지 않고 살겠다고 약속하고, 더불어 화평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해야 할 코란의 구절구절 을 염송한다고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다섯 번씩 기도하며 평생을 살다 보면 이마에 군살이 박힌다고 했다.

- 9권

 

그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말로 지은 원한은 백 년을 가고, 글로 지은 원한은 만 년을 간다.” 바로 이것이었다.

한국 불교는 선에만 집착하여 승려들이 산중에 묻혀 있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칠 뿐 대중과의 교류인 언어 소통을 경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성을 상실하고, 사회적 임무를 방기하고, 사회 봉사를 하지 않는 반쪽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식인이란 온갖 모순과 갈등이 뒤엉킨 사회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그 진실을 옹호하고, 그 진실을 실천하고, 그 진실을 전파하는 존재여야 한다.

-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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