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 바라나시
바라나시는 인도를 대표하는 도시다.
시바 신을 모시는 힌두교의 성지이자,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이 알려진 강가(Ganga, 갠지스의 새이름)가 있는 곳으로 수많은 여행자들이 한 번쯤은 반드시 들르는 도시가 아닌가 한다.
악기나 요가를 배우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 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른다.
3개월, 6개월, 때로는 기약 없이..
여행자들은 바라나시의 매력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 매력에 빠져들곤 한다.
바라나시는 동행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지였고, 이때쯤에는 이미 네팔로 넘어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기에 나는 도착하기 전부터 많은 생각과 상념에 젖어 있었다.
비록 밤 기차를 입석으로 타고 오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이기는 했지만..
바라나시 정션 역은 이른 아침 시간에도 엄청나게 북적거렸다.
그 혼란 속에서 겨우 겨우 릭샤를 잡아타고 메인 가트로 갔다.
가트(Ghat)라는 것은 강으로 직접 연결되는 계단이 있는 곳을 말하는데, 강가 주변에는 수많은 가트들이 있다.
이 중에서 다샤스와메드 가트를 특별히 메인 가트라고 한다.
지역적으로도 가트들의 중심에 있고, 원래 이곳이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10마리의 말을 바쳐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란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몰리는 곳이다보니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와 식당도 이 가트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TV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줬던 강가.
인도인들이 강에 바글바글한 장면을 기대했건만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강 주변은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넌 뭐냐?
조업 중인 배들.. 은 당연히 아니고, 일출을 보려고 관광객이 보트를 빌려탄 거다;;
이 사람들은 ‘도비왈라’라고 하는 세탁업자(?)들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인도에는 카스트라고 하는 계급제도가 오랜 시간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오랜 역사만큼 수명도 길어서 아직 사회 곳곳에 그 잔재가 상당부분 남아있는 듯 하다(내가 느끼기에도).
카스트에는 4가지 계급이 있는데, 그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최하층이 있으니 그들을 일컬어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라 칭한다.
닿기만 해도 좋지 않은 카르마가 쌓인다고 여겨지는, 그래서 사회적으로 완전히 천시되는 그런 사람들이다.
카스트에도 속하지 못한 아웃카스트, 간디는 이들을 포용하며 “하리잔(신의 아들이라는 뜻)”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한다.
실제로 여행하는 도중에, 인도인이 ‘하리잔~’이라고 부르면서 누군가를 칭하는 경우를 가끔 접할 수 있었다.
갑자기 이 얘기가 왜 나왔냐 하면.. 바로 세탁(도비)이라는 일이 그네들 받아들이기에 천했는지, 도비왈라는 (지금은 모르지만) 불가촉천민이 맡는 직업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진 하나에 설명 길어졌구만- _-
어쨌든 저 더러운 물로 세탁이라니.. 참 대단한 사람들;;
얘들은 왜 벗고 있냐?
메인 가트 주변의 골목들은 다 이렇게 비좁고 지저분하다.
그리고 소들이 계속 어슬렁~
낙타 사파리할 때, 추천 받았던 비쉬누 게스트 하우스는 이미 만원이었지만 다행히 그곳에서 만난 한국 사람 덕분에 깨끗한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시바 카시”라는 숙소인데, 네팔에서 돌아와서도 그 곳에서 계속 묵었다.
저녁에는 그냥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우리나라 남대문시장같은 느낌이 드는 잘 형성된 시장도 있고, 야채/과일 상인들도 숙소 가까이에 있어서 생활하기에 제법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물가도 저렴한 편=_=b
2월 6일 바라나시
밤새 모기에게 시달렸지만(북쪽으로 올라와서 날씨는 그다지 덥지 않았지만 강 주변이라 그런지 모기가 극성이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한국 음식이 그리워, 유명한 식당 “라가 카페”에 갔다.
한국 사람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라 재료도 한국에서 직접 공수해 온 것들..
깔끔하고 분위기도 제법 괜찮을 뿐더러 맛은 인도 전역에서 가장 좋았다, 당연히 가격도 최고였지만;;
점심을 먹고서는 화장터로 유명한, 마니까르니까 가트로 가봤다.
시체가 타는 역한 냄새와 매캐한 연기..
그러나 화장터라는 단어에서 엿보이는 엄숙함, 장중함, 경건함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는 묘한 곳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은 문화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일 수 있는 것 중 하나이겠지만, 그래서 우리네 정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화장 의식이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망자를 위한 의식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이방인의 눈에만 신기하게 보일 뿐..
이곳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는 인도인들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카메라를 꺼내들지도 못하게 한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악동심리 때문에 도촬을 몇 번 생각하기도 했지만, 왠지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해서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진에 영혼이 찍힌다는 오래된 믿음 때문이라고 들었지만, 얼마간의 기부금을 내면 사진 촬영을 허용하는 걸 봐서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돈이 영혼보다 절대가치가 더 높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화장할 때 사용되는 땔감들도 돈으로 흥정해서 결정되어 서비스 수준이 달라지니, 뭐든 경제 개념이 안먹히는 곳이 있겠냐만은..
(화장터는 네팔에서도 또 들렀는데, 그곳에서는 사진 촬영이 가능해서 몇 컷 찍어왔다;)
저녁에는 식당에서 한국인들과 동석하게 되어, 어찌 어찌 얘기하다가 내일 새벽에 같이 보트를 타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봤으니 일출 보트는 한 번 타봐야지=_=
워낙 하는 것 없이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보니, 인터넷 카페에도 자주 갔다.
어느 새 여행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메신져를 켜놓고 자주 가던 사이트들을 열심히 순회하는 나를 어느 순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기도 했지만(인간의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생각에) 한 편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이곳이 (온 지 며칠되지 않았지만) 편하게 느껴졌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기에 그냥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였다.
2월 7일 바라나시
어둑 어둑한 새벽에 숙소를 나서서 어제 약속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이 추가로 두 명을 더 데리고 와서 모두 6명!
이곳에서는 유명하다는 보트 주인, “철수”를 만나러 갔다.
오지탐험가 한비야가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 사람 상당히 유명하다보니 짝퉁도 여럿 있다고 한다.
인상이 선해 보이고, 한국말 잘하는 성실한 청년 이미지를 가졌는데 보트 저으면서 틈틈히 이것 저것 서툰 한국말로 안내도 많이 해줬다.
비록 흐린 날씨 탓에 원래 목적인 일출은 커녕, 우중충한 날씨 탓에 추위마저 느껴야 했지만..
날씨 정말 우중충..
이건 “디아(Dia)”라고 하는, 소원을 빌어 강물에 떠내려보내는 초다.
물에 살포시 올려놓아야 하는데 훌렁 뒤집혀버려 애써 빌었던 소원도 강물 속에 풍덩해 버렸지만, 다른 사람들도 강한 바람 때문에 촛불이 꺼지거나 나처럼 뒤집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조금 위안이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걸 재활용 판매하려고 한쪽에서는 열심히 건져내는 사람들이 있다;;;)
당시에 “철수”로부터 뭔가 설명을 들으며 찍었을 테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가트라는 게 이렇게 생겼다는 의미로 굳이 넣어봤다;
강 건너편을 찍은 것이다.
강가를 기준으로 강 이편과 저편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강 저편은 천막 몇 개와 사람들 몇 명이 있을 뿐, 굉장히 썰렁하다.
이걸 두고 저편에 사는 사람들이 무섭고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둥, 식인을 한다는 둥, 이편은 이승을 뜻하고 저편은 저승을 뜻해서 건너가면 절대 안된다는 둥 별 말이 많은데, 수영이나 보트를 통해서 왕래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로 봐서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암튼 마지막까지 미지의 세계로 남았던 곳이다.
이러니 일출은 구경도 못하지;;
보트를 탄 김에 마니까르니까 가트의 화장터를 한 장 담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본격적으로;; 화장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우리가 “타이타닉”의 한 장면이라고 칭했던, 서양인들.
그리고 오른쪽의 조그만 배는, 비디오와 TV를 싣고 즉석에서 상영과 판매를 하는 영업용 보트다;;
혐오 사진- _-;
소의 시체다. 어린아이, 임산부 등과 함께 화장을 하지 않고 바로 강물에 던져버리는 것 중 하나가 동물의 사체.
그 물로 씻을 사람은 다 씻는다;;
이렇게 수영하는 아저씨들도 은근히 많다.
체력들도 좋다=_=b
아침 먹으러 ‘라가 카페’ 가는 길, 골목에서 익숙한 상호 발견+_+
같이 보트 탔던 사람들이 안가봤다고 해서 어제 갔었던 라가 카페에 가서 먹은 아침백반.
여기에 레몬티까지 셋트로 나오는데, 가격대비 쵝오!
밥 먹고 나와서 빵집 들렀을 때 찍은 사진인데, 이 때 (인도와서 처음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 숙소로 바삐 돌아왔을 때는 어느덧 소나기로 변해버렸다.
그 당시에는 그냥 ‘와, 건기인데도 비가 오긴 오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엄청난 착오였다.
오랜만에 내린 비로, 골목 바닥에 얇게(어쩌면 두껍게) 덮여있던 진흙+소 응가가 결합한 알 수 없는 것들이 스믈스믈 일어나버려서 도저히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린 것;;
갑자기 겪어서 더 강하게 느껴졌던 그 찝찝함..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저녁에는 메인 가트에서 매일 해질 무렵 진행되는 “뿌자(Puja)”라는 의식을 보러갔다.
브라만 사제 5명에 의해 진행되는 강가 여신에게 바치는 일종의 제사 의식이라고 하는데, 워낙 관광객이 많아서 힌두교도 반+아닌 사람 반이라고 할 정도;
의식이 진행되는 중간부터 구경을 해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나중에 돌아와서 다시~)
매일 진행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화려하다거나 성대하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중간 중간 진지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힌두교도들의 모습, 행사 마지막 즈음에 다같이 박수치고 같이 대답하게 하는 집단 의식은 좀 인상적이었다.
특히 전체 행사가 마무리될 무렵에 그 곳에 무릎꿇고 오열하던 한 일본인(같아 보였다)는 도대체 무슨 심정인지는 모르지만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신의 계시라도 받았던걸까?
2월 8일 바라나시
아침에 일출 보트를 다시 타기로 전날 저녁 약속했었지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미안했었는데, 알고보니 다른 사람들도 못나왔다는 걸 알게되었지;;
자고 일어나면 해가 쨍쨍, 골목길들도 원상복구! 를 기대했지만 여전히 날씨는 우중충한 상태였다.
혼자서 사색하며 무언가를 끄적이던 아저씨(?)
날씨는 이래도, 가트는 언제나 북적북적 활기가 넘친다.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보트;;
굉장히 위험한 모습이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천천히 간다’는 룰을 철저히 지키기 때문에 저렇게 가득 태우고서도 버스든 보트든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 듯 하다.
입대 장병… 은 당연히 아니고;; 상주(喪主)다.
이 당시에는 몰랐었는데, 화장터에서는 그냥 화장만 시키는 게 아니라 일종의 진혼 의식을 함께 진행한다.
그리고 이때 상주가 머리를 삭발한 채로 의식에 참여하게 된다.
우연찮게 여행사(라고는 하지만 그냥 티켓 구매를 대행하고 환전 정도를 해주는 조그만 가게)에서 네팔로 넘어가려는 한국사람들을 만났다.
조금 고민하다가 나도 그들과 함께 국경을 넘기로 결정!
내일 저녁 출발로 갑자기 시간이 잡혀서 이때부터는 여기저기 쏘다녔다.
고돌리아 사거리에서 사이클릭샤.
보면 볼 수록 남대문이 생각나는 시장의 모습.
시장이라 해도 중간 중간 이런 사원은 한 두개씩 있다.
물론 골목 안에도 있다;
숙소 창문으로 보이던 원숭이 가족.
얘들 때문에 창문을 못열어놓고 다녔다;;
메인 가트에 있던 묘한 건물- _-;
정말 궁금했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뭐하는 것인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막상 내일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왜 그렇게 아쉬움이 밀려드는 건지.
며칠 간 이곳에, 이곳 사람들에게 굉장히 정이 들어버렸다.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사람 냄새를 진하게 맡을 수 있었던 곳이기에 아쉬움은 생각보다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네팔이라는 새로운 곳을 향한 기대감도 그 아쉬움을 달래지는 못했다.
그래서 결국, 북인도를 포기하고 네팔 여행이 끝난 후 다시 이곳에 돌아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2월 9일 바라나시
아침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일출 보트에 도전하려 했지만 잠이라는 녀석이 또 훼방을 놓아서 결국 포기;;
낮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려고 했으나, (기차 시간 때문에) 상영시간이 맞지 않아서 포기;;
마지막으로 창락이가 휴대폰 도난당한 것 신고하러 처음으로 경찰서에 다녀왔다.
한국에 있을 때도 못가본 곳 중 하나가 경찰서인데+_+ 어쨌든 다른 공무원들이 다 그렇듯이 무성의하고 뭔가 믿음이 안가는 경찰서와 경찰의 모습에 좋은 인상은 받지 못했다.
겨우 받아낸 폴리스 리포트도 우리 의도와는 다르게 작성되어서 좀 실망스러웠고;;
저녁에는 결혼 행렬을 구경할 기회가 생겼는데 떠날 준비로 마음이 바빴던 상황이라서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24살 먹었다는 신랑(액면가는 +10 정도?)이 백마를 타고, 긴 꼬리를 가진 요란한 행렬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가는 모습만 겨우 지켜봤다.
듣기로는, 그렇게 신부집까지 가서 파티 비슷하게 다 같이 어울려서 즐긴다고 한다.
암튼 네팔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날인데도 별로 하는 것 없이,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보내서 굉장히 아쉬웠던 하루였다.
그냥 마지막으로 떠나감을 아쉬워하며 사진을 몇 장 남기는 행동밖에는 한 게 없었던 것 같다.
숙소 가는 골목의, 꽃과 도기를 팔던 한 허름한 가게의 7남매들.
그 중에서 가장 개구쟁이스럼던 ‘산토스’의 모습.
너무나 가난한 환경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밝게 뛰노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항상 그 ‘밝음’ 변치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내가 묵었던 숙소에서 온갖 잡일을 도맡아서 하는 12살 소년, ‘디푸(Dipu)’.
집에서는 그저 잠만 잔다고 제 스스로 말하는 걸 보면 고된 생활에 많이 지쳐있을 텐데도 무척 밝고 명랑하다.
나중에, 점점 능구렁이가 되어가는 모습을 얼핏 보여주기도;;
그 밖에도 한국말이 능숙했던 보트맨 ‘철수’, 그때 같이 잠깐 어울렸던 한국에서 온 여학생들, Dosa 파는 가게에서 마주쳤던 수줍음 많던 꼬마 숙녀 ‘꼬말’,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이 굉장히 익었던 여러 상인들, 식당 종업원들,…
이렇다 할만한 ‘행동’이 없어서 그랬을까?
떠나려고 보니, 생각나는 건 ‘사람’밖에 없었다.
(물론 오랜 시간 함께 동행했던 창락이와 연락 두절로 은근히 걱정이 들게 했던 나영&혜민이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고..)
단골로 다녔던, 숙소 인근 ‘옴 베이커리’의 맛나는 메뉴들과 그곳 노트에 적혀있던 앞선 여행자들의 추억담도 오래 기억에 남으리라.
2월 10일 소나울리, 바이라와
같이 국경 넘기로 한 일행 셋은, 청주 출신의 고등학교 친구들이라 굉장히 허물없는 사이들이었고, 이 친구들이 굉장히 싹싹하고 성격들이 좋아서 나도 편안하게 어울릴 수 있었다.
기차역에서 기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넷이서 플랫폼에 자리를 펴고, 고스톱을 치기도 했는데 신기한 광경에 가뜩이나 호기심 많은 인도인들이 계속 힐끔거리더라;
그래도 시간 보내기에는 이것만 한 게 없다;;
이미 출발부터 늦어졌던 기차는 도착 시간을 세 시간이나 늦춰서 고락푸르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바로 역 앞에서 합승 짚을 타고 두어 시간쯤 구겨져서(예상보다 훨씬 낡은 짚차에 무려 11명이 오밀조밀=_=) 달린 후 ‘소나울리’라는 국경 도시에 도착했다.
당연하지만 믿음 안가는, 인도 immigration office에서 간단히 출국 신고를 하고,
잘 있어라, 인도야!
짜라잔, 여기는 네팔+_+
이렇게 한 50여 미터 걸어가니 어느 틈엔가 네팔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오로지 ‘돈’을 얻어내는 것이 목적으로 보이는, 네팔의 immigration office에서 5분만에 비자를 받고 당당히 입국!
환전을 하고, 밥도 먹으며 대충 둘러봤지만 아직은 국경지대라서 인도와의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인도 화폐도 그대로 사용되고(인도와 네팔은 지들끼리 정해놓은 1:1.6의 환율을 몇 십년간 유지하고 있다. 워낙 경제 규모가 작은 네팔이라 인도에게 은근슬쩍 붙어서 해결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요즘 인도가 한창 발전하는 상황이라 얼마나 더 지속될 지는 모르겠다. 암튼 웃긴 녀석들;;), 음식도 같다;
시골 마을이라 그런지 좀 더 한적하고 조용한, 그리고 덜 지저분한 이미지이기는 했지만..
이미 시차 변경으로 15분을 손해보고 있긴 했지만.. (인도는 한국 시간 대비 -3시간 반, 네팔은 -3시간 15분)
릭샤를 타고 바이라와 버스 스탠드로 갔다.
보통은 이곳에서 가까운 ‘룸비니’에 먼저 들르지만, 딱히 정해둔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라서 다른 사람들 따라 우선 ‘포카라’로 가기로 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네팔리들과는 처음으로 얘기를 나눠봤다.
옆 자리에 있던 아저씨 하나가 우리가 한국 사람인 걸 알고서는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한국에서 1년 간 머무르며(한남동에서) 일을 했었다고 하는데,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적어도 표정에서는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워낙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권 문제가 시끄럽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기에 그 아저씨의 태도는 나로서는 썩 반가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속마음이야 알 수 없겠지만..
바라나시에 있을 때 ‘네팔은 너무 좋은 곳이다’라는 말을 여러 여행자들로부터 들어왔던 탓에 많은 기대를 하고 넘어왔지만 아직까지는 왜 좋다는 것인지 공감이 안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생김이 많이 비슷한 네팔리들이라서 좀 친숙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결정적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버스가 인도스타일 저리 가라로 작고, 낡고, 불편해서, 그리고 길은 마치 강원도 산길 마냥 꼬불꼬불하고, 버스는 느릿느릿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엽기적인 상황이 이어지다보니 기대감은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다시 시작된 설사병으로 몸 상태도 최악;;
어쨌거나 버스는 밤새 달려서 새벽 5시 무렵 ‘포카라’에 도착했다.
새벽시간이라 그랬겠지만 자고 있던 우리들은 그대로 방치해놓고 시동까지 끈 상태로 다 내려버려서, 어둠 속에 우리만 남겨진 것을 알고 적잖이 놀라기는 했지만..
[다음 편에 계속=ㅂ=ㅋ]

















































September 10th, 2007 at 1:33 am
그리운 인도ㅠ
인도 모습이 잊혀져가려고 하는 지금
오빠가 찍은 사진들 보니깐 그 추억들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기분
내가 봤던 360도중에 1도의 모습이겠지만.
아득해진 259도를 생각나게 해주는 장면장면들
September 10th, 2007 at 1:51 am
넌 또 갈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도 무궁무진하잖아.
자꾸 배부른 소리하면 미워할꼬야-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