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10

“전라도 놈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겉으로는 잘해주는 척하다가도 꼭 뒷통수를 때리는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다.”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편견 중의 하나가 바로 “지역 차별” 정서다.

흔히 “지역 감정”이라는 말로 통용되는 이 정서는 많은 경우 호남 vs. 영남 또는 호남 vs. 비호남의 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호남지역과 그 지역민들에 대해 근거없는 악감정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이를 단순한 상대적 대립 구도로 파악하기는 힘들다.

성격은 좀 다르지만, 멀리는 고려 시대 왕건의 “훈요 10조”에서도 나타나는 “지역 차별”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독재정권 하에서의 세뇌교육 덕분인지 자기도 모르게 이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며, 심지어는 호남사람들 조차도 이런 편견의 주체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이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별 등으로 확대재생산되기 때문에 “지역 차별”은 훨씬 더 복잡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너와 나는 한민족, 한 국가의 국민식의 어느 정도 감정적인 타협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회 곳곳에 자리한 다른 지역 차별적 요소들이 잔존하는 한 완전한 감정의 극복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옛날 어른들이나 그랬지, 요즘 젊은 애들은 그런거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서 반사회적인 사건이 터지기라도 하면 각 뉴스 포털 사이트에 달리는 덧글 중 상당수가 이런 지역 차별 정서에 오염되어 있는 것을 한 번이라도 목격한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건 희망사항이지 이루어진 현실이 아니다.

정도는 약해졌는지 모르지만 젊은 세대들 역시 대부분 자기도 모르게 이런 지역 차별 정서를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터넷처럼 익명성의 방패 뒤에서 야비한 패거리 문화가 이루어지는 영역에서는 여지없이 까발려지곤 한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 역시 잠깐이나마 이런 편견에 사로잡혀 특정 지역출신 사람들을 싸잡아서 미워하고 무시했던 적이 있다.

군대에 입대해서 자대생활을 막 시작할 즈음의 일인데, 당시에 부대의 실세인 선임병들은 열에 여덟 정도는 전라도, 특히 광주와 전남 지역 출신이었다.

예전에 어른들로부터 “전라도 놈들은 상종 못할 족속이다.”라는 주문을 어렸을 때부터 주입당해온 나는,

그 선임병들의 횡포(그들이 저지른 내무 부조리도 상당히 심각했다)를 보고 겪으며 그러한 주문에 점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후에 호남 출신의 좋은 사람들을 여럿 만나면서 다행히 이런 감정은 대부분 치유되었지만 군대를 전역하고 사회 생활을 다시 시작할 때 즈음에도 약간의 앙금은 남아 있었다.

강준만 교수의 “전라도 죽이기”, 약 10년전에 출간된 책이다.

전역 후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알아 가면서 지역 차별 정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전라도 출신 중에는 악질적인 놈들이 많다.

그러나 좋은 사람들은 이보다 더 많다.

그리고 경상도 출신 중에도 악질적인 놈들이 많다.

그러나 역시 좋은 사람들은 이보다 더 많다…

지역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역사적, 지리적, 사회문화적 배경 때문에 각 지역 출신들이 다른 지역 출신에 비해 어떤 차별화된 기질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일방적으로 단점으로만, 또 장점으로만은 해석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해주고 집단보다는 개인을 우선시하는 사회, 그런 사회는 아직 요원한 것인가.

 

ex libris;

뻔한 질문도, 던져보면 새삼스러운 인식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중략] 분명히 존재하되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 그것이 바로 ‘전라도 편견’인 것입니다.

– p.31

 

호남차별을 없애기 위한 운동은 호남차별 해소만 부르짖을 때엔 사회운동으로서의 파급력이 약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차별을 없애고자 하는 범국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차별이든 그 차별의 기저를 관통하고 있는 정신을 폭로하고 교정하면 다른 분야의 차별도 저절로 사라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 분야의 차별을 없애는 일에 우선순위를 부여해 다른 분야에서의 차별에 대해 둔감하거나 심지어 그 차별의 본질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p.150

 

우리는 때로 나쁜 것보다는 지겨운 것을 더 싫어한다. 나쁜 사람은 나쁜 짓을 저지르고 침묵하거나 점잔을 뺄 수 있다. 나쁜 사람은 억울할 게 없으니까. 그러나 나쁜 사람으로부터 당한 사람은 억울함을 못 이겨 내내 떠들어대며 울부짖는다. 그런데 그건 주변에서 감내해주기가 정말 어렵다. 그 지겨움을 매일 겪는 사람은 어느덧 누가 정말 나쁜 건지 그 구분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 p.198

 

개인은 착해도 집단은 얼마든지 악할 수 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인들이 그랬고,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있는 모든 강대국들의 국민이 그랬다.

– p.239

 

출간된지가 오래되어 구독하기는 어려울 수 있어도, 한번쯤은 읽어봐야 할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 ★★☆☆☆

3 Responses to “강준만 著 – 전라도 죽이기”

  1. DK Says:

    그 책은 나오자 마자 읽었었지요.

    전 전라도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군대도 전문연구요원으로 갔는 데, 대학교 다닐 때와 회사 다닐 때 그런 미친 타도 인간들을 많이 봤습니다.

    일단 책을 보고 다소 깨셨다니, 정상인으로 복귀하신 거 다행이고요.

    나중에라도 만나는 전라도 사람들마다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그 생각 안바뀌시길 바랍니다.
    (보통 정상인들에게는 이런 부탁 안합니다만…)

    만일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실 거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전라도 사람 만나면 미리미리 본인의 그런 취약한 근성을 알려주시고 마치 지역 감정 없는 인간인양 행동하진 마십쇼. 그래야 최소한 그 전라도 사람이 나중에 님이 변하면 배신감은 안느낄 거 아닙니까?

    그게 자신 없고 안되겠으면, 괜히 친해질려고 하지 마시고, 서울 식으로 거리를 두고 지내시고요.

    그게 전라도 사람들과 잘 지내는 비결입니다.

  2. Ratatosk Says:

    난 큰집이 전라도라 반대로 자라왔지….
    군대에서 지역사람마다 다른 사고방식이나 생태(;;)를 느낄 수 있어서 재밌었지. 다들 잘 지내겠지. 아하하

  3. admin Says:

    뒤늦게 달아보는 리플..
    DK님// 제가 아직은 미성숙한 인간이라 제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적어도 ‘출신지역’이라는 불완전한 필터를 통해서 보지 않도록 노력해 볼 작정입니다. 아무튼 조언 감사합니다.
    Ratatosk님// 4월에 쓴 글에 갑자리 리플은-_-; 날 더운데 건강한거지? 개강하기 전에 애들 좀 챙겨야 할 텐데.. 역시 나란 놈은 너무 무심한 성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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