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11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사람들은 하나둘씩 눈이 멀어 버린다.

그러나 단 한사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런 상상을 그대로 그려낸 소설이다.

실제로 일어난 적도 없고, 그렇게 될 개연성도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주제 사라마구는 새로운 세상을 멋지게 창조해낸다.

그리고는 독자로 하여금 눈먼 자가 되어 그가 창조해낸 눈먼 자들의 도시 속에서 살게 한다.

형식적으로 이 소설은 세 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첫 번째는 문장 부호가 없다는 점이다.

직접 화법인지 간접 화법인지, 묻는 건지 외치는 건지 독자는 문맥을 통해 스스로 간파해야 한다.

따옴표도 느낌표도, 따옴표도 없다. 단지 쉼표와 마침표 뿐이다.

이런 독특한 문체 때문에 책을 읽기 시작한 초반에는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50페이지만 넘겨보라, 어느 틈엔가 익숙해진 문체는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두 번째는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없다는 점이다.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 의사, 의사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 검은 안대를 한 노인, …” 이런 식으로 불릴 뿐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시점인데,

기본적으로는 전지적인 3인칭이기는 하나 간혹 숱한 눈먼 대중속의 한 사람이 개입할 때가 있다.

눈먼 사람들의 세상은 그들이 눈이 멀지 않았을 때와 별로 다를게 없다.

똑같이 시기와 질투가 있고, 반목과 대립, 강요와 억압, 약탈과 폭력이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배려와 존중, 용기와 의지, 희망과 사랑이 함께 한다.

재밌다, 정말.. 손에서 책을 놓기가 힘들 정도로 재밌다.

그러나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상당히 강하게, 그리고 크게 울리는 소설이다.

조지 오웰의 1984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꼭 봐야할 책. ★★★★★ ★★★★☆

 

ex libris;

그래,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 진 거야, 반은 무관심으로, 반은 악의로.

– p.52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시다.

– p.166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런 식으로 진실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을 하기도 하는 법이다.

– p.177

어쩌면 눈먼 사람들의 세상에서만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사람들도 그럴까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물었다. 사람들 역시 그럴 겁니다, 그들을 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 p.180

두려움은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더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 pp.184~185

이 눈먼 사람들은 우리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곧 짐승으로 변할 것인데, 더 심각한 것은, 이들이 눈먼 짐승으로 변할 것이라는 점이다.

– p.188

언제 살인이 필요할까, 그녀는 생각하면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직 살이 있는 것이 이미 죽은 것이 될 때.

– p.270

정신은 스스로 창조해 낸 괴물에 굴복할 때 망상을 겪게 되는 것이니까.

– p.324

정부는 있지 않겠습니까,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있다 해도, 눈먼 사람들이 눈먼 사람들을 통치하는 정부겠죠, 그러니까 무(無)가 무를 조직하려는 것과 똑같을 거예요. 그럼 미래가 없겠구려,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말했다. 미래가 있다 없다 하는 이야기는 못하겠어요, 지금 중요한 것은 당장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방법을 찾는 거예요. 미래가 없다면 현재도 소용이 없소, 현재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오.

– pp.358~359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냐고는 묻지 말아주세요.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 p.387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 p.419

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

– p.423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는 미리 알 수 없는 거예요, 기다려봐야 해요, 시간을 줘봐야 해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

– p.449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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